프리드리히 3세는 선제후직(選帝侯職)을 계승하면서 팔츠 영방국가를 다스리게 되었고, 그는 매우 경건한 지도자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영방국가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굳건하게 서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모든 교회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들을 올바르게 배워 참된 신앙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기를 원하였다.
우르시누스는 그의 스승의 추천에 의해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초빙을 받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선제후의 명령으로 교육용 요리문답을 작성하게 되면서, 독일 남부지역에 개혁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출판되자마자 개혁신학(칼빈주의)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라틴어, 영어, 불어, 화란어 등으로 변역이 되면서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어 나가게 되었다.
프리디리히 선제후는 종교적 관용정책을 위하여서 당시에, 박해를 받던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많은 개혁교회 신자들이 하이델베르크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때 모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를 갖고 갔으며, 네덜란드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교회의 공식 요리문답으로 채택하여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