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질문들
왜 인간은 종교적 확신에서 악을 행할 때, 가장 잔인하며 즐거워하는가?
왜 9/11 테러처럼 종교적 대의를 위한 “이타주의적인 악”이 증가하는가?
왜 종교가 점차 더욱 편을 가르며, 더 폭력적이며 묵시적 형태가 되는가?
왜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했는가?
왜 남을 탓하는 책임 회피적 “비난의 문화”와 “희생자 의식”이 위험한가?
왜 우리사회의 일베들은 자신들이 “희생당한 피해자들”이라고 규정하는가?
종교가 혐오와 폭력의 원천인가, 아니면 혐오와 폭력이 종교를 낳았는가?
기독교는 십자군전쟁, 종교전쟁, 마녀사냥, 종교재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왜 아브라함의 세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서로를 미워하는가?
왜 유일신종교는 고대세계의 다신론에 대한 정치적인 항거로 등장했는가?
유일신종교 속에 병적인 이원론이 쉽게 똬리를 트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바벨탑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었는가?
종교를 대체하려는 노력들은 왜 모두 잔인한 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는가?
냉정한 율법을 가르친 오경 안에 있는 많은 이야기의 기능은 무엇인가?
가인이 아벨(‘하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문명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왜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내러티브 밑의 카운터 내러티브가 중요한가?
창세기는 형제자매 사이의 라이벌 관계를 어떻게 치밀하게 해결하는가?
왜 형제자매 사이의 화해와 회개 없이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불가능한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나그네’ 정체성을 유지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세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이집트를 빼낸 방법”은 무엇인가?
왜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만드는가?
다신론 형태의 종교는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생겨났다. 그때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도 없었고, 종교는 국가에 대한 초월적 정당화였다. 도대체 왜 세상에 위계질서가 있는가? 하늘에 위계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 하늘을 다스리듯이, 파라오, 왕, 또는 황제가 땅을 다스렸다. … 종교는 권력에 대한 적나라한 추구를 은폐하기 위해 입힌 거룩한 옷이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아브라함의 유일신론이 하나의 계속적인 항의로서 등장했다.
(18쪽)
자살폭탄 범인들과 무슬림 성전(聖戰)주의자들을 포함해서 가해자들 상당수는 유럽 출신이며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이 급진주의자들이 되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로 간주되었던 사람들이다. … 그 급진주의자들이 동료 무슬림들을 한 사람씩 죽이면서 얼마나 침착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그들이 내 눈앞에서 사살한 사람들 모두가 무슬림들이었지만 말이다. 그 살인자들은 행복해보였다.” 이처럼 평범하고 정신병자가 아닌 사람들을 냉혹한 살인자들로 둔갑시켜, 어린 학생들, 원조기관의 활동가들, 저널리스트들과 기도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이 치명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다. 그 이름을 붙이자면, 이타주의적인 악(altruistic evil)이다. 즉 높은 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거룩한 대의를 위해 자행하는 악이다.
(25-26쪽)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대해 최근에 많은 논의가 있었고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그 대답은 세 가지 주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종교는 폭력의 주요 원천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보다 평화적인 세계를 위해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로, 종교는 폭력의 원천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종교는 폭력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 세 번째로, 그들의 종교는 폭력적이지만, 우리의 종교는 폭력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우리의 종교는 평화를 위한 종교인 반면에, 그들의 종교는 전쟁을 위한 종교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28쪽)
20세기가 잔인하게 또한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실은 종교에 대한 현대의 위대한 대체물들, 즉 민족, 인종, 정치이데올로기와 같은 대체물들은 그 자체의 대리신들(surrogate deities)에게 인간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데서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돌아온 종교는 사람들이 점차 기대하게 되었던 부드럽고 조용하며 평화를 추구하며, 종교간 일치를 추구하는 종교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공격적이며 적대적인 종교 형태로서, 주님의 원수들과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으며, 타락한 시대를 끝장내고 하나님, 진리, 신의 뜻에 대한 순종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묵시종말 시대를 가져올 준비가 된 종교 형태다.
(32쪽)
애당초 그 충돌을 야기한 신학은 대부분 수정되지 않은 채 응고된 DNA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 홉스가 말한 시민전쟁과 부족전쟁의 혼란 속에서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애당초 폭력적 충돌로 이끄는 신학을 우리가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신학 작업을 새로 하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21세기를 특징지었던 테러에 계속 직면하게 된다. 테러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39-40쪽)
또한 특정한 국가의 인구 전체를 효과적으로 악마화하는 것도 어느 때보다 쉬워졌다. 지하드와 자살폭탄 지원자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무슬림들이 타인들에 의해 굴욕을 당하는 모습들이 쉬지 않고 방영되기 때문이다. …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과 달리 인터넷 상에서는 서로가 비인격화되기 때문에 훨씬 더 상대방에게 무례할 수 있다. 웹에서 논평 부분을 읽어보면, 이상 대신 분노가, 논증 대신 욕설이 난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예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또한 예의가 완전히 사라지면 문명 자체가 위험에 처한다.
(42-43쪽)
십자군전쟁 시대든 아니면 오늘날이든, 종교적 폭력의 희생자들은 유대인들보다 기독교인들과 무슬림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이처럼 반유대주의를 자세하게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이 혐오로 바뀌고 다시 살인적인 폭력으로 둔갑함으로써 합리성을 죽일 뿐 아니라 파괴적이며 동시에 자기파멸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적이며 심리적인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44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독이 스며들어있는 관계로서, 나는 그 이유를 해명하려고 한다. … 첫째로, 이타주의적인 악을 가능하게 만드는 특수한 정신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이원론(dualism)이다. … 둘째로, 이런 정신구조를 키우는 신화들이 있으며, 이 신화들은 놀라울 만큼 영속성이 있고 적응력이 강해서, 하나의 종교로부터 다른 종교로 이동할 뿐 아니라 세속적 문화에도 잘 적응한다. 셋째로, 아브라함의 세 종교 사이의 독특한 관계는 그 종교들을 서로 긴장 관계 속에 있게 만든다. 아브라함의 세 종교 각각은 애당초 나머지 두 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 아니면 자기들의 새로운 신앙이 더 우월하다고 인정했다.
(44-45쪽)
나는 창세기의 그 이야기들이 이제까지 이해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하며, 이제까지 종교적인 동기에서 자행된 폭력들의 상당수는 그 이야기들을 충분히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이야기들이 도전하는 복합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46쪽)
우리 시대에 급진주의적인 정치화된 종교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런 종교가 나타난 것은 반세기 전에 내린 몇 가지 결정들이 전체 학교들과 신학교들로 하여금 헌신하도록 만든 명제,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 최종적 결과는 혼돈, 폭력, 파괴의 홍수로서 무고한 자들과 죄인들을 함께 익사시키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들과 똑같이 진지하게 평화, 용서, 사랑을 위한 교육을 해야만 한다. 오늘날의 모든 전 지구적 기관들이 혐오 교육과 혐오 설교에 맞서기 전까지는, 모든 외교적 노력과 군사적 개입이 실패할 것이다.
(47-8쪽)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사랑, 자비, 희생, 자선과 같은 숭고한 것들을 말해왔다. 그러나 그처럼 고상한 감정들은 흔히 동료 신자들이나 최소한 동료 신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다. 비신자들, 즉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 그리고 같은 종교를 신봉하지만 이단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종교는 잔인하고 냉혹할 수 있다.
(55쪽)
병적인 이원론은 도덕의식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다. 비인간화는 공감과 측은한 마음을 파괴한다. … 희생자 의식은 도덕적 책임감을 회피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이라고 말하도록 만든다. 이타주의적인 악은 선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악한 일을 자행하도록 만든다. 높은 이상을 명분으로 내세워 평범한 사람들을 살인자들로 둔갑시킨다.
(86-87쪽)
1942년 1월,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멸절시키기로 “최종 해결책”을 결정한 반제회의 참가자들 중 절반 이상이 의학박사였거나 박사학위 소지자들이었고, 친위대 장교들의 41%가 대학졸업자들로서 당시 전체 인구의 대학졸업자 비율은 2%에 불과했다. 줄리앙 벤다는 유명한 책 ≪지성인들의 배반≫(1927)에서, 어떻게 공적 담론이 “정치적 증오심을 조장하는 지적인 조직”으로 둔갑했는지를 보여주었다. … 이원론이 문화를 휩쓸기 시작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거의 없다.
(88-89쪽)
도덕이 패배하는 두 번째 단계는 희생자라는 의식(victimhood)을 확립하는 것이다. 적들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자행하려는 악에 대한 책임감을 넘겨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희생자로 정의해야만 한다. 따라서 살인을 하고, 심지어 종족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방어의 행위가 된다.
(93쪽)
지라르의 논제는 두 집단이 보복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방법은 제3자를 죽이는 것이라는 점이다. 몬태규 가문이나 캐플릿 가문이 아닌 존재, 그 반목 바깥에 있어서 그를 죽여도 또 다른 보복으로 이끌지 않는 존재를 죽이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그 희생자는 아웃사이더로서, 한 집단의 보호를 받지 않는 사람, 또는 한 집단의 구성원이지만 보복적 폭력을 가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115쪽)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루터가 유대인들이 개종하지 않는 이유는 가톨릭교회의 부조리와 잔인함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사랑으로 다가가면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기독교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자, 그의 분노에는 끝이 없었다. 1543년에 루터는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해≫라는 팸플릿을 출판해서, 증오의 문학에서 고전이 되었다. 회당들은 불살라야 한다. 유대인들의 집은 파괴해야 한다. … 유대인들의 기도서와 탈무드는 압수하고, 랍비들은 가르치는 일을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 루터는 유대인들을 “우리의 재앙, 유행병, 불운”이라고 불렀다. 이 팸플릿은 나치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다시 인쇄되었으며, 그 주장은 뉘른베르크 법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119-20쪽)
18세기의 서부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계몽주의를 통해, 이성이 과거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러나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을 추방한 다음에도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은 계속되었다. 그런 편견을 지속시킨 사람들 중에는 유럽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 임마누엘 칸트는 유대인들을 “사회의 흡혈귀”라고 부르면서 “유대교의 안락사”를 요청했다. 헤겔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노예도덕”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사랑의 종교를 이해하거나 실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20-22쪽)
그런 적대감은 이야기와 정체성과 상관이 있다. … 형제자매 사이의 라이벌 관계는 창세기의 중심 주제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라헬과 레아, 요셉과 그 형제들의 관계는 라이벌 관계다. 그것은 유대교의 핵심 주제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에 그 관계는 기독교에서도 주제가 되었는데, 특히 바울의 편지들에서 그렇다. 나중에 이슬람이 태어났을 때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41쪽)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자기이해를 뒤집는 것이었다. 우리가 매일 여러 차례 기도를 통해 고백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녀들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기억, 역사, 정체성을 구성한다. 바울은 다르게 주장한다. 바울에게는 사라가 기독교를 뜻하는 반면에, 하갈은 유대교를 뜻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유롭지만, 유대인들은 노예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삭이며, 유대인들은 이스마엘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속하지만, 유대인들은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 더군다나 바울은 말라기서(1:3)를 인용하여,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바울이 암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신앙을 신실하게 지키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거절당했을 뿐 아니라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146-9쪽)
히브리성서는 실제로 형제자매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창세기의 중심 주제다. 그 요점을 창세기보다 더 강력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종교적 행위, 즉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친 행동 자체가 직접 첫 번째 살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벨을 편애하신 것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는 제로섬 게임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유대인들, 기독교인들, 무슬림들이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그런 식으로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사람들이 이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이라면 어쩔 것인가? … 창세기의 이야기들이 표면상으로는 하나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문 안의 단서들에 비추어 보면 그 표면 아래의 또 다른 단계를 드러내도록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156-7쪽)
우리는 방금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야기를 읽었으며, 그 메시지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아브라함이 모든 인류 가운데 선택받은 것처럼, 그의 아들 이삭도 선택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삭이 장남이 아니라 이스마엘이 장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뒤바뀜의 이야기(a displacement narrative)처럼 보인다. … 그러나 여기서는 그 순서가 뒤바뀐다. 장남인 이스마엘 대신에 그의 이복동생인 이삭이 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사라와 이삭에게 행복하지만,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비극적이다. … 바울은 로마서에서 두 번째 뒤바뀜을 주장하여, 새로 생긴 종교인 기독교가 오래된 종교인 유대교를 대신하여 그 언약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에서는 그 이야기가 또 다시 다른 방식으로 뒤바뀌어, 선택받은 사람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장남으로서 할례를 받았으며, 언약의 징표를 지녔기 때문이다.
(163-4쪽)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표면적인 해석이다. 우리가 이처럼 복잡하며 미묘한 본문의 껍질들을 벗겨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랍비들이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앞뒤가 맞지 않는 점들을 발견했으며, 또한 이 이야기가 전혀 다른 놀라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오직 피상적으로 읽을 때 내리는 결론이 이삭은 선택받은 반면에 이스마엘은 거절당했다는 결론이다. 사실상 이처럼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첫 번째 세대에 관한 전략적 요충지에서, 히브리성서는 하나의 내러티브(a narrative)만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카운터 내러티브(a counter-narrative)도 담고 있다.
(164-5쪽)
그리고 한밤에 씨름한 후에, 야곱은 뜻밖에도 역할을 뒤집는다. 땅에 엎드려 절하는 사람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며, 야곱은 자신을 “하인”이라고 부르고 “에서”를 “나의 주님”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놓치기 쉬운 이유는 이 이야기 안의 모든 것이 우리의 주의를 에서의 행동에 맞추도록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에서의 행동(포옹하고 입 맞추고 함께 우는 행동)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야곱의 행동이 보다 더 이상하다는 것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204쪽)
이처럼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하게 반전을 일으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왜 요셉은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 속에 넣게 만든 후, 형들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는가? 그런 속임수와 계략은 왜 꾸몄는가? 왜 요셉은 형들에게 강제로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만들었는가? 그것은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런 계략은 요셉의 꿈이 더 빨리 이루어지게 만들기보다는 더 늦어지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31쪽)
인간의 자유보다 더 자주, 더 다양하게 부정되는 것은 없다. 운명과 팔자, 즉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아난케’(ananke)라는 것이 신들의 손이나 별들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은 태초부터 사람들이 주장해왔던 것이다. 나중에는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 탓이라거나(칼뱅), 물리적 결정론(스피노자), 아니면 경제적 힘(마르크스), 아동 초기의 경험(프로이트), 유전적 요소들(네오다위니즘) 탓으로 돌렸다. 이와는 반대로 히브리성서는 만일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원인들의 결과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비극적으로 만들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며, 또한 시간이란 영원히 반복되는 순환에 불과한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결정론에 맞서서 성서는 자유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단언한다.
(238-9쪽)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소련이 붕괴되었고, 냉전도 끝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한 몇몇 분석가들은 우리가 심각한 국가 전쟁이나 이데올로기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으며, 결국 전 세계에 걸쳐 확산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후, 서구세계는 테러의 밀물에 직면하고 있다. 중동지방의 몇몇 국가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서구의 가치들에 매우 적대적인 종교적 극단주의가 성장하고 있다.
(269쪽)
이것은 도덕철학이 적절하게 대결하지 못했던 문제다. 플라톤 이래로 사상가들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만드는 많은 요인들, 즉 지식, 습관, 미덕, 공감, 연민, 합리성, 직관 등을 탐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이 1930년대 독일에서 어떻게 실패했으며, 단지 대중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도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았다. 그것이 도덕적 감수성을 마비시키는 이원론의 힘이다.
(270쪽)
그러나 유일신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거룩한 길, 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구원받는 길이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타자로서 공감하는 것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믿는 사람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그를 개종시킬 의도일 경우에만 예외가 된다. 경계선을 넘는 공감은 때로 종교를 그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데, 종교의 거룩한 과업 중 하나는 경계선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75-6쪽)
우리는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들은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아브라함과 같은 임시 거주자로서의 떠돌이 형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패러다임이 크게 바뀌는 순간 중 하나에서, 레위기 25장은 그런 기대를 박살낸다.
(279쪽)
이 책의 모든 분석 배후에 있는 분명한 질문은 “도대체 왜 하나님은 애당초 선택하실 필요가 있으셨는가?” 하는 것이다. 왜 선택받은 아들과 선택받지 못한 아들의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져야만 했는가? 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인가?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인가? 왜 모두가 아니라 아브라함인가? 왜 모든 인류가 아니라 이스라엘인가?
(283쪽)
히브리성서의 근본 관심사 중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폭력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성서가 이 문제와 직접 대결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성서 본문을 읽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성서가 폭력 문제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예배에 대해 기록한 처음 행동인 가인과 아벨의 예물이 곧바로 첫 번째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종교와 폭력 사이의 연결성은 처음부터 뚜렷하다.
(284쪽)
우리는 이제 창세기 내러티브의 구조 속에 들어 있는 강력한 사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창세기 내러티브가 보편적인 원형들-아담, 하와, 가인, 아벨, 홍수, 노아와 맺은 언약과 바벨탑에 대한 비판-로 시작한 다음에 아브라함의 언약이라는 특수성으로 바뀐 것은 우리의 공통적 인간성이 우리의 종교적 차이성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타인들의 종교가 자신들의 종교와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종교는 모두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298쪽)
이것은 창세기 1장을 다시 진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그 반대다. 창세기 1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창세기 9장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은 인간의 탁월함(“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을 말한다. 그러나 창세기 9장은 살인 금지를 선포한다. 그 둘 사이에 비극이 있다. 자연에 대한 정복을 허락받은 인간은 그 힘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려고 했고, 그 결과는, 가인에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폭력과 살인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창세기 9장은 창세기 1장을 반복한 것이 아니라 뒤집는 것이다.
(300-1쪽)
그래서 경전에 근거한 모든 종교는 그 자체의 해석 전통을 발전시켰다. 랍비 유대교는 성서주의, 즉 구전전통을 배격하며 기록된 문자의 권위만 받아들이는 성서주의를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랍비들은 “한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다. 요점은 분명하다. 해석 없이는 본문도 없다. 전통 없이는 해석도 없다. 또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처럼,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 3:6).
(308쪽)
역자주: 고고학자들은 1세기에 예루살렘의 인구는 아마도 10만 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본다. 예루살렘 탈무드에는 성전이 파괴될 당시 예루살렘 안에 회당이 480개 있었다고 말하는 반면에,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394개 있었다고 말한다. 70년에 제2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기원전 586년에 제1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보다 영적인 공백상태가 덜 심했던 이유는 이처럼 수많은 회당들 덕분이었다. Louis H. Feldman, “Palestine and Diaspora Judaism in the First Century,” in Christianity and Rabbinic Judaism: A Parallel History of Their Origins and Early Development, ed. by Hershel Shanks, (Biblical Archaeology Society and Pearson, 2nd ed. 2011), 11-12, 24.
(329쪽)
출애굽기와 그 정치적인 주제들-노예, 해방, 폭정, 자유-보다 앞에 창세기와 그 가족들의 삶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룻기의 사랑과 충성에 관한 비정치적 메시지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 같은 정치적 책들의 역사적 전주곡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 이것은 헬레니즘 윤리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배격하는 것이다.
(337쪽)
묵시론은 예언이 희망을 잃어버릴 때 나타나는 것이며, 정치가 인내심을 잃어버릴 때 벌어지는 것이다. … 그것이 생겨나는 것은 사람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변화의 시대이며, 부당하게 뒤에 처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 사회적이며 종교적인 격동의 시대에, 이런 천년왕국 종파들은 전염병처럼 확산된다. 특히 소외되고 밀려났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343쪽)
종교가 폭력으로 치닫는 것은 혐오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 때다. 그것이 4세기에 교회에 닥친 비극이었다. 그 후 6세기가 지나 나타난 폭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문화 속에 혐오를 모셔두면, 잠복기를 거치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잠재적으로 치명적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만 죽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더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사랑의 종교 이름으로 무슬림들, 이단자들, 마녀들, 종파주의자들을 죽였다.
(356쪽)
예수의 산상설교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최고로 아름다운 생각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모세는 보다 살아낼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원수들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원수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오는 단순한 명령의 기초다.
(360-61쪽)
히브리성서에는 흔히 오해받는 요소가 있다. 하나님의 복수에 관한 말씀이다. 시편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이 복수해주실 것을 위해 기도한다. 도대체 왜 사랑, 용서, 미래에 헌신하는 종교에서 그런 복수를 위해 기도하는가? 그 신비를 풀어낸 사람 중에 예일대학교 신학 교수 미로슬라브 볼프가 있는데, 그는 본래 크로아티아 출신으로서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참혹한 민족 전쟁들을 직접 목격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화해에 관한 용기 있는 책을 썼다.
(363쪽)
우리 자신을 희생자라고 정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인간이게 만드는 것을 축소시킨다. 그렇게 정의하면,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 비난은 책임을 지는 길을 막는다. 희생자는 자기의 조건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의 현재 상황의 원인을 자기 바깥에서 찾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만든 덫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는 실제 현상(고통, 가난, 문맹, 질병)을 허구적인 원인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증상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 비난의 문화는 그들이 맞서서 저항하는 모든 조건을 영속화시킨다.
(368쪽)
아벨(Abel)은 히브리어로 ‘헤벨’(Hevel)인데, 다른 것들 가운데, 전도서의 핵심어로 나온다. 그 두 번째 문장에는 ‘헤벨’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이상 나온다. 그래서 번역 성서는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로 번역한다. ‘헤벨’은 “무의미하다, 효과가 없다, 쓸데없다, 소용없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런 번역들은 그 요점을 놓친 것들이다.
(372쪽)
따라서 더 많은 테러, 더 많은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며, 중동지방과 아프리카에서는 더 많은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요르단과 레바논과 같은 다른 국가들은 깊은 구렁에 빠질 수 있다. 더욱 야만적인 새로운 “인도에 반하는 범죄들”이 벌어질 것이며, 인터넷을 통해 확산될 것이다. … 알카에다와 같은 운동이 패배할 때마다, 또 다른 운동이 일어나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의미, 정체성, 공동체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그런 운동에 말려들 것이다. 실제로 세계는 이와 비슷한 도전에 한 번도 직면했던 적이 없었다.
(379쪽)
전쟁은 무기로 승리할 수 있지만,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사상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사상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 전체를 통해서 형제살해와 종교적 폭력의 원천이었던 형제자매 사이의 라이벌 관계에 대한 (성서적인) 대안을 찾는 것이다.
(387쪽)
제1부 나쁜 믿음
1. 이타주의적인 악 / 17
2. 폭력과 정체성 / 49
3. 이원론 / 73
4. 희생양 / 103
5. 형제자매 사이의 라이벌 / 133
제2부 형제자매들
6. 이복형제들 / 161
7. 천사와의 씨름 / 189
8. 역할 바꾸기 / 219
9. 배척을 배척하다 / 245
제3부 열린 가슴
10. 낯선 나그네 / 267
11. 정의의 보편성, 사랑의 특수성 / 283
12. 어려운 본문들 / 307
13. 권력의 포기 / 325
14. 혐오 내려놓기 / 351
15. 권력 의지인가, 생의 의지인가 / 371
참고문헌 / 395
옮긴이의 말 / 413
“저자의 강력한 주장의 핵심은 창세기에 대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해설인데, 창세기 이야기를 새로운 눈으로 다시 읽게 만든다. … 이 책은 오늘날과 같은 폭력적 세상에 대한 귀중한 탐구로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군전쟁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는 기본 본문들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듣도록 초청한다. 그 대안으로 이 책이 권위 있게 공통의 인간성에 근거한 공적인 삶의 실천을 가리키는 것은 모든 부족적인 유혹들을 뒤엎어버린다. … 지혜롭고 중요하다.”
-Walter Brueggemann, The Christian Century
“종교적 폭력의 뿌리에 대한 긴급하고도 권위 있는 탐구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분이 쓴 책이다. 창자를 뒤틀리게 만드는 저자의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들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들이 완벽한 학자가 깊게 생각하고 치밀하게 선택한 언어들임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가 히브리성서를 읽는 방식은 빈틈이 없으며, 흔히 사람들이 놓치는 의미의 층들을 밝혀준다. 저자는 명민하며 확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학자로서, 그의 방법론적 해체는 성서에 대해 잘못 읽는 오독을 폭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향해, 혐오를 내려놓게 만드는 신학을 향해 나아가도록 역설한다.”
-Barbara Mahany, Chicago Tribune
“이 놀라운 책에서 저자는 종교 전쟁들이 이슬람에만 독특한 것이 아님을 치밀하게 문헌으로 뒷받침한다. 그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믿는 종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폭력에 반대하는 논증들이 세속적 사상들에서만이 아니라 신학 안에서도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E. J. Dionne Jr., The Washington Post
“저자의 분석은 철학, 정치학, 사회과학들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박식한 정신을 보여준다. 저자가 그 문제에 주목하고 또한 그 모든 자원들을 이용해서 종교적 신앙과 폭력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신학적으로 씨름하는 데서 그의 가장 위대한 공헌을 찾아볼 수 있다. … 나는 종교인들이 함께 읽고 공부하기 위한 새로운 책으로 이 책보다 더 중요한 책을 생각할 수가 없다. … 저자는 온 세상을 위해 깨달음을 주며, 그의 메시지는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주고 있다.”
-Michael Jinkins (president, Louisville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The Huffington Post
“저자는 이슬람의 폭력이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경전을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더욱 지혜로운 믿음과 부드러운 하나님을 밝혀준다. 이 책은 통찰력이 넘치며, 날카롭고 아름답게 쓰여진 책이다.”
-William Saletan, The Wall Street Journal
“냉철하면서도 영혼을 뒤흔들어놓은 이 책은 창세기를 기막히게 해석한다. … 랍비 조너선 색스의 신학자로서의 총명함이 빛나는 책이다.”
-Irshad Manji, The New York Times Book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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