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신비적 요소를 대할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앞서 논의했던 유혹, 즉 자신의 사고방식을 선호하고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고픈 유혹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혹에 넘어간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담긴 풍성한 신비를 상실할 것이다.
(2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갈수록 확장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갈수록 자라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시간을 위해 더 잘 준비될 것이다. 그곳에서도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그분의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의 영원한 찬송을 위해 돌아갈 것이다.
(61)
물론 이것은 두 종류의 삼위일체가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창조와 구속에서 성삼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반(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정말 의미하는 바는 피조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론적 성품을 소통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 이전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내재적으로만 표현되던 것과는 달리 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85)
육체 안에서 극적으로 이뤄진 성자의 낮아지심, 그 영광스러운 신비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오직 송영밖에 없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예배한다. 이는 단지 성부와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도 하나님이며, 따라서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 예배의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신 일을 모두 완수하셨기 때문이다.
(131)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우리의 찬양은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언약을 맺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찬양은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담긴 위엄에 주목하면서 지극히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
(182)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담긴 그 신비는, 적절한 방식으로 인식되지 못할 경우, 우리를 분노, 좌절, 또는 불신앙으로까지 이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이끌리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여기고, 하나님을 지나치게 낮게 여기는 사고에 기인한다.
(228-229)
하나님의 섭리는 대개 서로 구별되면서도 불가분한 두 가지 성경적 개념 아래 논의된다. 첫 번째 개념은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리심이다… 두 번째 개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그분의 보존하심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치하실 뿐 아니라 보존하시고 유지하신다.
(240-243)
기도는 하나의 우연적인 순종의 선택으로서,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281)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그 기도에서 선포된 바대로) 베드로의 최후 인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신비하고 장엄한 방식으로, 그 둘은 서로 완벽하게 작용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진리는 기도의 실재를 필요로 한다. 이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288)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정해진 운명이다. 그러나 충만하고 완전한, 영원한 미래로 들어가는 것조차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담긴 신비의 위엄을 결코 소멸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더욱 향상시킬 것이다. 온전히 안다는 것은 이 공부를 통해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신비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