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주년기념교회 주일 예배 설교 텍스트로 사도행전을 선택한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저의 첫 목회지였던 ‘주님의교회’에서 요한복음 순서설교를 끝으로 10년 임기를 마친 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목회의 장소와 형태 그리고 목적은 달라져도 목회의 영속성이 단절되는 것은 아니기에 요한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을 선택하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100주년기념교회로 저를 불러내신 주님께서 제게 부여하신 소명이 한국 교회의 출발점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묘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출판된 요한복음 설교집 〈요한과 더불어〉의 주제가 ‘주님과 동행’이라면 〈사도행전 속으로〉의 주제는 복음의 결과인 ‘교회 되기’이므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인 양화진에서 사도행전을 통해 참된 교회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_1권, 6쪽, 서문 ‘참된 교회를 그리며’에서
그러므로 이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킬 처방은 우리 스스로 예배당 안에 가두어 둔 하나님의 우상을 버리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임해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모신 증거의 장막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자기 변화로 받아들이며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교회 밖에서도 주님을 자신들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이요, 그들 자신이 움직이는 증거의 장막이었기 때문입니다.
_3권, 308쪽, 24. ‘증거의 장막 I’에서
만약 누군가가 주님을 믿는데도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해 주심을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주님의 말씀에 단 한 번도 자신을 던져 본 적이 없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던져 본 사람이 계속 자신을 던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던져 본 사람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_8권, 20쪽, ‘1.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에서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우리 각자는 자기 인생 무대 위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면서도, 왜 그 인생 무대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지 까닭도 알지 못하는 본문 속 미련한 군중입니까? 아니면 비록 화를 당할망정, 인생 무대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 자신의 인생 무대에서 말씀을 지키고 말씀을 증언하는 현장으로 승화시키는 사도 바울 쪽입니까?”
_12권, 202쪽, ‘태반이나 알지 못하더라 I’에서
대체 바울이 어떻게 로마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바울의 결단이나, 의지나, 능력으로 인함이었습니까?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시아 대륙의 바울을 처음부터 끝까지, 로마제국의 중심인 유럽 대륙의 로마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친히 훈련시키시고, 그의 내공이 깊어지기를 기다리시며, 조금도 조급함이 없이, 한 걸음씩 그리고 조금씩, 당신의 신비로운 방법으로 로마를 향해 바울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결과 20대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당시로서는 인생 말년인 50대가 되어서야 로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휘페레테스와 마르튀스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로마에 이르는 데, 무려 30년의 세월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 30년의 세월 동안 바울은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매일 매일 주님의 이끄심에 성실하게 자신의 삶으로 응답하였습니다.
_15권, 449쪽, ‘이와 같이 로마로 V’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