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처럼 오가던 그는 한 솥밥을 먹는 식구食口가 되면서 달라졌다. 그는 저녁식사가 끝나면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놀다간다. 가끔은 직장에서 받은 결혼 답례품으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기도 한다. 손님이 많을 땐 가족처럼 주문을 받아주고, 손님테이블에 있는 빈 그릇도 치워준다.”
– 23쪽「식구食口」중에서 –
“노모의 손을 꼭 잡고 오는 중년의 남자가 있다. 모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와서, 어머니는 비빔냉면을 드시고 아들은 물냉면을 먹는다. 두 사람은 냉면이 나올 때까지 말 한마디 없이 멀뚱히 앉아있는데, 만일 둘이서 손잡고 오는 걸 보지 못했다면 모르는 사람끼리 앉았나보다 여겼을 거다. 그렇게 남남처럼 앉아있던 두 사람은 냉면이 나오면 다시 다정한 모자관계로 바뀐다. 아들이 엄마의 비빔냉면에 육수를 조금 부어주면, 어머니는 열심히 비벼서 냉면 한 올, 양념 한 톨 남김없이 말끔하게 비운다.”
– 80쪽「음식이상의 의미」중에서 –
“단골이 된 그는 이야기보따리도 풀어놓았다. 어릴 때 서울의 달동네에 살았다는 그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생계를 위해 산꼭대기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굴비를 훔쳐 먹던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 118쪽「음식이 있는 사랑방」중에서 –
“공단에서 사업을 하는 아빠는 냉면을 며칠만 안 먹으면 생각이 난다며 수시로 온다. 그는 혼자 올 때도 있지만, 가족과 지인은 물론 멀리 공단에 있는 회사 직원들까지 데리고 온다. 일하다가도 달려오는 그는 냉면에 마약을 넣었냐고 한다.”
– 149쪽「마약냉면」중에서 –
“볕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지내다보니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 된 것 같다. 곰은 동굴 안에서 100일 동안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었다는데, 나는 반대로 곰이 되려나.”
– 226쪽「코로나19 자가 격리 일지」중에서 –
“삼십여 년 동안 성취지향적인 직장인으로 살던 나를 한 순간에 바꾸어 놓았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진 내 습관과 경직된 사고를 편안하고 넉넉하게 해주었고, 일상적인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으며, 평범하고 진솔한 삶이 주는 즐거움도 알게 해주었다. 가장 큰 소득은 느림의 미학을 배운 것이다. 빠름을 지향할 때는 긴장과 조급증이 있었고, 머리는 강했으나 마음이 부족했었다. 그런 내가 느린 삶을 익히면서 멈춰 생각하게 되고 감정을 읽고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238쪽「터닝 포인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