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에 누인 아기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뉘어 있는 것, 이것이 성육신의 복음입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입니까? 무한하고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비 중의 신비이고 복음의 시작입니다.
– p33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물론 반갑고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 보면 마냥 좋은 일만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시는 것 자체가 그분에게는 고난일 테니까요. 태어나신 장소도 그렇고 출생 8일 만의 할례, 40일 후의 대속도 다 고난입니다. 귀한 분이 죄인이자 포로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낮아지심으로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아들이 되는 명분을 얻었습니다.
– p43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말씀은 고향 밖에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이제 새 시대가 도래했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죄의 포로가 된 자들에게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 복된 소식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 p66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베드로의 위대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속적인 사랑에 기인합니다. 지상에 계실 때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말씀과 성령을 통해 부르십니다. 베드로를 끝까지 부르신 예수님께서 마찬가지로 우리를 끝까지 부르십니다. p77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큰 일을 행하신 다음에 “불쌍히 여기신 것”이라는 어구가 따라 나옵니다(5:19).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해방시킨 것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긍휼히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거라사 사람들도 동일하게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가장 큰 이유는 귀신 들린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 p109
예수님의 영화를 통해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영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죽음을 거치지 않고도 부활의 몸으로 변하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몸과 주님의 몸은 다릅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거쳐야 하지만 주님의 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언제든지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으심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 p120
‘누가 크냐’고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누구의 보내심을 받았는지 물으십니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한 분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크냐’는 논쟁은 불필요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예수님이 보내신 자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정말 주님이 보내신 자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는가?”
– p129‘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에 우리는 너무 익숙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p144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자기 힘으로만 구하려는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와 신자 간에 중요한 차이점은 불신자들은 항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살아내야 하니까요. 그러나 신자는 고민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때 준비물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 p161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구하는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겸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p234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이나 소유를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관리에게 재산을 팔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말한 것도 이제는 예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공적인 고백입니다.
– p241
예루살렘의 멸망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교훈을 줄까요? 무엇보다 성전이 건물로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이 없어졌기 때문에 성전과 관련된 모든 것이 폐지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전이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크고 화려한 교회당을 세워 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선포되는 복음을 통해 세워져야 합니다.
p266-267
탄생
1. 복음의 시작 (1:5-23) 18
2. 큰 기쁨의 좋은 소식 (2:1-20) 27
3. 대속받은 대속자 (2:21-39) 36
4. 주의 오심을 예비한 자 (3:1-14) 45
갈릴리에서
5. 첫 설교 (4:14-30) 58
6. 제자를 부르심 (5:1-11) 68
7. 안식일의 두 사건 (6:1-11) 79
8. 죄사함과 영접의 태도 (7:36-50) 89
9. 귀신 들린 자를 해방시키심 (8:26-39) 99
10. 영화롭게 되신 주님 (9:28-36) 111
11. 잘못된 질문 (9:46-48) 122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12.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10:25-36) 134
13.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 (10:38-42) 145
14. 밤중에 찾아온 친구 (11:5-8) 154
15. 무엇이 지혜로운 인생인가 (12:13-21) 163
16. 좁은 문 (13:22-30) 173
17. 계산하는 믿음의 제자 (14:25-33) 182
18. 아버지의 마음 (15:11-32) 190
19. 부자와 나사로 (16:19-31) 200
20. 인자의 날 (17:22-37) 214
21.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18:9-15) 224
22. 삭개오를 찾아오심 (19:1-10) 235
예루살렘에서
2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20:27-40) 246
24.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심 (21:5-19) 258
25. 하나님 나라의 질서 (22:24-30) 269
26. 겟세마네 성소에서 기도하신 예수님 (22:39-46) 277
27. 슬픔의 길 (23:26-31) 293
28. 구원받은 행악자 (23:32-43) 303
2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24:13-35) 315
30. 그리스도의 승천 (24:50-53) 326
제목대로 누가복음을 정말 복음 그대로 보여 주는 설교집입니다. 저자는 정확하고 세심한 누가를 따라 역시 정확하고 세심하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주님이자 구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이 하신 일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생하고 실천적으로 보여 줍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저처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감동하리라 확신합니다. 지금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예수님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분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 한재술, 그책의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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