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탈종교사회라고들 하지만 여전히 다양한 종교들이 다원적으로 존재하며 그 종교들마다 나름의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예배의 의미는 쉽게 다른 종교와 사상들의 영향을 받아 모호해지기 일쑤다. 그러므로 우리 예배의 현실을 잘 들여다보고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의 모습과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은 저자가 시드니신학대학에서 전통적이고 현대적인 예배에 관한 열세 가지 주제로 강의한 내용을 묶어서 만들어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사유를 따라 아주 쉽고도 자연스럽게 예배의 본질과 현실, 전망에 대해서 사유하고 길을 찾아 가게 될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종교 시대를 지나 과학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한다. 자신들은 예배하지 않으면서 이 과학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 어떻게 지금까지 예배가 살아남았는지 신기해 한다. 대부분 예배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면 전근대적인 습성에 젖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인들이 늘상 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 없는 종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장 ‘예배의 현실’ 중)
예배하면서 교회가 탄생했다. 예배가 곧 교회라는 말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인데, 이 모임이 곧 예배요 교회이다. 교회가 예배를 기획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교회가 생겨났다. 교회가 세워지고 난 다음에 교인들이 모여서 우리가 하나님을 이래저래 예배하자고 의논해서 예배가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분 백성을 부르셔서 하나님 앞에 세우신 것이 예배였고, 이렇게 예배하면서 교회가 생겨났다. 이렇게 예배와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교회보다 예배를 먼저 앞세워도 된다. 예배가 교회를 불러낸다.
(2장 ‘예배와 교회’ 중)
기독교회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예배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들 한다. 여느 종교와 다를 바 없이 열심히 신을 섬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신이 주는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회의 예배는 다른 종교의 것과는 전혀 다른 예배이다. 기독교회의 예배는 모두가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세상 예배의 거짓됨을 폭로한다.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기독교회의 예배는 언약적인 예배이다. 교회의 예배는 예배자의 욕망을 투영시킨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 가운데 친히 찾아와 주심으로 시작되는 예배이다.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예배는 세상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인간 중심적인 적극적 세계관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의 예배는 사람의 욕망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폭로하고 책망한다.
(4장 ‘예배와 세상’ 중)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고서는 예배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을 때에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다. 예배하면서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서 내가 혼자인 것 같았고 아무도 나와 함께 있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외로웠는데,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나는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구나. 나 혼자만이 아니라 저 성도도 나와 동일한 고난을 당하면서 한 주간 이 세상을 살았을 텐데, 우리가 함께 예배하는구나.” 이렇게 예배에 참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한다. 예배에 참석하면서부터 우리는 모든 외로움을 떨쳐 버린다.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연합을 누리지 못하고 홀로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얼마나 손해인가.
(5장 ‘예배와 회중’ 중)
예배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과 그분 회중 간의 교제이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순서가 있고 거기에 회중이 반응하는 순서가 있다.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 받아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 물론 하늘이 그리스도를 다시 받으셨다. 처음에 계셨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다시 주신다.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지만, 그때까지도 이 땅이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초림과 재림 사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공백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6장 ‘예배와 그리스도’ 중)
예배는 원래 ‘삼위일체적’이다. 굳이 구분해 보자면, 성부께서는 예배를 친히 기획하시고, 성자께서는 친히 예배하시며 예배가 되시고, 성령께서는 예배에 활력과 생명을 불어 넣으신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부께서는 예배의 주체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예배의 내용이시고, 성령께서는 예배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배의 주체이신 성부, 예배의 내용이신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셔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예배가 형식적인 종교행사가 될 수밖에 없다.
(8장 ‘예배와 성령’ 중)
주일은 그리스도의 과거 부활을 목격하고 우리의 미래 부활을 내다보면서 지금 우리가 부활한 것을 확증하고 기뻐하는 날이다. 주일을 한 주간의 첫날로 여기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안식일은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주일은 한 주간의 첫날이다. 구약에서는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마지막 날에 안식했다. 신약 시대는 다르다. 우리는 주일에 안식하고 난 다음에 6일 동안 일하러 나간다. ‘6+1’이 아니라 ‘1+6’이다. 이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주일에 확인하고 난 다음에 6일 동안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6일 동안 영적으로 죽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부활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9장 ‘예배와 시간’ 중)
예배하는 공간은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다. 예배하는 공간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예배 공간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과장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예배당 건축의 역사는 그 공간이 세상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시소게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예배당 건축의 역사는 하늘과 땅을 통합시키려는 노력, 즉 성과 속을 통합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당 건축가들은 예배당을 천상의 것들과 모든 속된 것들이 화해하여 만나는 곳이라고 믿었다. 이런 종합을 드러내기 위해 고대 교회는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수평성과 수직성의 조화 및 통합을 위해 고심했다.
(10장 ‘예배와 공간’ 중)
성령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신다. 성령께서는 예배를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신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곧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예배를 발전시킨다. 예배 시작인 ‘예배로의 부름’도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하고, 예배 마침인 ‘강복 선언’도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도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찬양과 기도도 그리스도로 인해 가능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예배를 누릴 수 있고, 그리스도를 알아 갈 때 예배는 가장 크게 발전한다.
(13장 ‘예배의 발전’ 중)
1장 예배의 현실
2장 예배와 교회
3장 예배와 언약
4장 예배와 세상
5장 예배와 회중
6장 예배와 그리스도
7장 예배와 직분
8장 예배와 성령
9장 예배와 시간
10장 예배와 공간
11장 예배와 형식
12장 예배와 체험
13장 예배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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