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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인간, 본시오 빌라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2의 사르트르’라 불리며 현대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문화와 철학, 종교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의 해석으로 다섯 번째 복음서를 빚어냈다. 『빌라도 복음서』는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2001년 프랑스 ELLE 독자 대상을 수상하였다.
권력과 이성理性의 세계, 사랑과 용서의 세계
나는 예루살렘을 혐오한다. (…) 이 도시는 위선과 억눌린 열정으로 악취를 풍긴다. 성벽 위의 태양에서조차도 반역자의 냄새가 난다. 자네는 로마를 비추는 태양이 예루살렘을 어슬렁거리는 태양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겠지.
(본문 p.105)
유대 지방에 임명된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편지는 위와 같이 시작된다. 풍습에 따라 짧게 자른 머리카락과 매끄럽게 면도된 살결을 가진 이 로마 남자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는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진실로 믿으며 살아왔다.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반역자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빌라도와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가 ‘마법사’라고 칭하는 예수는 비단 로마법상의 반역자만이 아닌 이 세계와 진리를 뒤집어 놓는 조용한 혁명가였다.
예수의 죽음, 그리고 그 시체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빌라도는 전력투구한다. 낮에는 병졸을 손수 이끌고 날카로운 창끝으로 밀짚 속을 뒤지고, 증인들을 만나 수수께끼와 단서들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히는 문답을 끝없이 이어간다. 밤이 깊어도 빌라도의 머리는 잠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좇는다.
현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심한다. 현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더 추하고, 난폭하고, 음험하며, 왜곡되었고, 모호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하며, 도발적이고, 부당하고, 변덕스러우며, 무관심하고, 거만한,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을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예측하고 있다.
또한 나는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바짝 추적한다. 나는 현실의 궁둥이를 항상 뒤쫓아 다닌다. 나는 그것의 모든 약점과 악취를 잡으려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현실을 눌러 짜 그 더러운 즙을 뽑아낸다. (본문 p.128)
빌라도가 사건 수사 중 만나는 인간 군상, 그리고 유대 땅 구석구석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우리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놓인다. 내리쬐는 태양빛 아래 놓인 유월절 희생 제물들, 흩날리는 닭 깃털과 염소의 울음소리, 푸줏간 주인의 피 묻은 칼, 총독 관저 앞에서 죄인의 처벌을 구경하려 웅성대는 시민들…….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는 문화와 종교, 역사와 철학에 대한 해박한 식견과 특유의 신선한 시각, 탁월한 묘사를 이번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발휘한다. 역사와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탄탄한 배경 묘사, 추적과 증거의 배반이 반복되는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묘미, 전통적인 로마네스크적 소설의 얼개 중 어느 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
호기심 많고 당당한 로마의 여인이자 빌라도의 아내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 예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는 제자이기에 스승을 고발할 수밖에 없던 가롯 유다, 유대 최고 법정이며 예수 처형에 가장 앞장섰던 산헤드린의 구성원이지만 예수에게 신망과 지지를 보내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율법학자 니코뎀, 매혹적이면서도 누구보다 현명한 눈으로 예수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던 막달라의 마리아, 호색한이지만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새로운 왕의 탄생을 기다리는 로마인 파비안, 퇴폐적인 아름다움 뒤에 숨어 끊임없이 권모술수를 벌이는 유대 왕 헤로데와 왕비 헤로디아, 그리고 그들의 잔인한 딸 살로메 공주……. 주인공 본시오 빌라도뿐만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해와 사정에 의하여 예수의 뒤를 좇는다. 독자들은 그 과정에서 정의와 술수, 율법과 사랑이 벌이는 끝없는 힘겨루기와 맞닥뜨리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양가적 상황 속에 등장인물을 배치하여 고민하도록 만들고 끝내 입체적 캐릭터를 완성하는 슈미트의 영리한 소설쓰기를 맛보는 순간이다. 인간의 아들로 살아가던 예수가 왜 죽음을 기다리며 식은땀을 흘리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프롤로그 격으로 펼쳐지는 1부에서부터, 빌라도가 결국 예수의 일부를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짜임새와 설득력은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란 말이오?”
소설의 시작과 끝은 빌라도의 세계, 곧 이성과 완력의 세계가 예수의 왕국 앞에서 어떻게 와해되고 또 다시 공고해지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빌라도 복음서』의 독자들은 책을 읽어가며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의 품에 안기는, 장엄할 정도로 기적적인 순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슈미트는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빌라도와 예수에게 갖는 의미를 천천히 우리에게 드러낸다. 배경으로서의 예루살렘은 곧 빌라도와 예수의 세계가 함의하는 개념으로 그 지평을 넓힌다.
크라테리오스는 자신의 커다란 손을 내 이마 위에 얹었다.
“가엾은 빌라도, 자네는 팔레스타인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네. 태양빛이 결국 자네의 이성을 가져가버렸구먼.”
“그가 부활했소? 그렇소, 안 그렇소? 그가 단지 현자요, 아니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오? 그가 메시아요?”
나 자신도 놀랍게, 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억제할 도리 없이, 나는 그런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문 p.287)
빌라도가 스승 크라테리오스에게 반기를 들며 누구도 해소할 수 없는 물음을 울부짖듯 던지는 이 장면에서, 두 세계가 강렬하게 충돌하는 데에서 오는 빌라도 내면의 소용돌이를 엿볼 수 있다.
혼란에 헐떡이는 빌라도와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예수가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전하는 그의 왕국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만큼 쉽게 잊고 마는 기독교 정신의 기본 윤리이며 이상이다.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내가 차지할 어떤 자리도, 주장할 어떤 왕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을 뿐이었다. 나는 사람들의 지도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나는 영혼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렇다, 나는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부추기는 그런 식은 아니었다. 나는 가난한 자, 유순한 자, 배척받은 자, 여자들을 항상 맨 처음에다 놓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습격하고 권력과 명예, 부의 소유자들을 뒤엎는 그런 정치적 혁명은 이끌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나로부터 영감을 받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 (본문 p.81)
실제로 그것은 아주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추상적인 왕국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변형될 것이다. 그것은 외관상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로부터 사랑으로 되살아나고, 사랑이 스며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 왕국이 일어나려면 먼저 사람들이 그것을 소원해야만 한다. 씨앗이 척박한 땅 위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말라죽어버린다. 반대로 씨앗이 기름진 땅 위에 떨어지면 그 씨앗은 자라 열매를 맺는다. 예수의 말은 다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경우에만 존재할 것이다. 예수의 사랑에 대한 메시지는 단지 사람들이 정말로 사랑하기를 원할 때에만 실현될 것이다. (본문 p.297)
빌라도가 클라우디아의 말처럼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남을 수 있을지, 과연 우리의 세계는 ‘사랑’이라는 이 보편타당의 의제를 얼마만큼 받아들이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빌라도 복음서』가 기독교 신자와 비 기독교도에게 두루 읽히며 감동을 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2장 편지
유월절의 예루살렘 105 바라바와 랍비 예수 109 하느님의 아들과 제자들 128 예언 147
살로메와 마리아 166 갈릴리의 헤로데 189 진짜 예수 204 사랑과 용서 224
클라우디아 프로큘라 234 십자가 247 음모 261 호색꾼 파비안 266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270 예수의 무덤 274 순례자의 망토 283 빌라도의 여행 289
갈릴리를 향하여 291 빌라도와 마리아 293 메시지 296 물고기 299 사랑과 평등 301
예수의 승천 305 재회 310 최초의 기독교인 311
옮긴이의 말 325
슈미트는 자신이 넘치는 재능과 세심한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가장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르 몽드
이 신비로운 추리소설은 독자들을 생생한 논쟁으로 끌어들인다. -르 푸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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