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기독교 교리가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일명 ‘냐냐’)로 상징되는 서구 배타주의 방식의 틀 아래서 형성되었기에 전체성(All)을 보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성경을 동양적 하나(이것도 저것도, both-and, 일명 ‘도도’)의 진리로 재해석하여 예수의 말씀을 불이(不二)인 동양적 문화로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기독교가 하나(One)의 영적 운동으로 물질주의라는 수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진리 즉 참된 도리(이치)는 영원불변하는 보편적인 하나(One)며, 만물은 만 가지 형태로 드러내지만, 그 종착점은 하나이다. 도(道)는 “궁극적 진리(不二)”로서 모든 것을 껴안는 둘이 아닌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과 불교인, 선과 악을 똑같이 사랑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보편적인 신이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의 정체성은 죄인(롬 5:18)이 아니라 예수와 같이(요 1:9) 빛(神)으로부터 온 “빛의 자녀”(마 5:16)로서 본래부터 신이며(요 10:34, 本來是佛), 또한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롬 11:36).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 신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예수만이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신의 자녀이므로”(갈 4:6-7), 무죄성이다.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ego)는 존재하지 않으며 드러난 전 우주가 나(One) 자신이다. 따라서 나는 모든 것의 근원인 절대적 인간이다. 선과 악, 고와 낙의 이원적 대립하는 두 가지에서 선택을 한다면 천국의 진리를 상실하게 된다. “미움과 사랑,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이원성은 마음의 분별(ego)에 의한 것”이므로, 무분별심(One)은 “영원한 즐거움이 자신의 존재 전체에 밀려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본서는 예수의 진리를 ‘냐냐’가 아닌 ‘도도’로 이해하고 있다. ‘냐냐’의 영향으로 갈등하여 반목하고 나와 다른 이들을 향하여 혐오와 차별 거부와 배제로 가득 찬 분열된 세계를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교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우리로 분열을 넘어 하나(one, 도도)의 세계로 인도해 주고 있다.
진리는 소수의 전유물이거나 특정 종교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진리는 공기와 같아서 편재(遍在)하고 편만(遍滿)하다. 하지만 입과 코를 막은 자가 공기를 마시지 못하듯 진리에 귀와 마음을 닫으면 진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심명(信心銘)과 도마복음은 1,500년이 훨씬 넘은 책들이다. 그 책들에 마음을 열어 귀를 쫑긋 세우는 일은 바울이 말한 어린아이의 일이 아닌 어른의 일이다. 이제 젖을 먹는 어린아이를 넘어 단단한 음식을 먹는 어른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마음 모아 추천하는 바이다.
<추천의 글_장병기 목사> 중에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考古學的)인 발견으로 기독교계와 학계에 강한 충격을 주고 있는 도마복음은 믿음을 넘어서 영적인 “신성(神性, 성령)의 깨달음”(막 8:17) 즉 하나(One)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 저자들이 일 년에 걸친 유대인의 예전(禮典)에 따라 그들의 관점에서 전례용으로 편찬한 성경과는 차이가 있다. 도마복음은 동양적 비이원론(非二元論)인 부처의 말씀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현대물리학에서 우주를 역동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전체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도 맥을 같이하는 “하나인 진리”의 말씀이다. 따라서 오늘날 종교 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공통점인 본질(One)을 보여주는 도마복음은 인류의 미래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역사(役事)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영적인 경전이다.
<머리말_지은이> 중에서
“개체는 전체”(一卽多)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진리대로 만족과 평화로움으로 살아가게 되어있다. 불이의 진리 안에 서는 생사 문제조차도 대립이 아니라, 서로를 도와주는 상보적이며 순리적인 현상이다. 고통을 벗어나 행복하게 사는 길은 영원한 진리인 “자신의 생명”(true Self)을 되찾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사물의 본질(One)을 깨닫는 것이다. 즉 생각을 억지로 고요하게 할 것이 아니라, 나와 우주 만물이 “하나의 생명”인 신이라는 것을 믿고, 신의 뜻 즉 천지 우주의 오묘한 순리에 따른 삶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전체성인 진리(One) 안에서 순리 그 자체대로 살아가게 되어있으니 분별적인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성(ego)에 의한 모든 근심, 걱정은 모든 만물이 전체성(영적)으로 조화롭고 완전한 “생명의 실상”임을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우주의 에너지인 신에게 맡기고 “집착이 없는 순수함”으로 거듭나면 모든 번뇌와 고통이 사라진 완전한 천국을 볼 수 있다(요 3:3). 즉 육체의 나는 “그림자와 같은 허상(ego)”임을 자각한 경지(One)이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하면 결국 내가 옳으니까 상대는 틀리지 않을 수 없으며, 이분법적인 분별심으로 남을 심판을 하면 그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種豆得豆). “모두가 관계의 고리로 얽혀있는 유기체”(重重無盡의 緣起法)에서는 남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므로 이원적인 것에 머물러 분별하면 진리를 모르게 된다. 혜능대사는 “진리인 자기 성품이 청정한 자는 다른 사람의 시비, 선악을 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의 진리를 벗어나 분별(ego)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간음하는 것”(마 5:27)이라고 말씀하셨다.
<1장_둘이 아닌 하나(One)의 진리> 중에서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될 때 실재인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마 5:8), 모든 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의 현현(顯現) 즉 신적이며 영적인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신(法身6)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고”(如來常住無有變異, 열반경), “모든 것 중에 모든 것” 즉 “모든 것이 신”(엡 4:6)이므로 우리도 역시 신(神, 부처)이다(요 10:34). 일시적인 파도가 바닷물(One)인 것처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자(如實知見) 즉 깨달은 자(마 13:23)는 모든 것에서 신성을 발견함으로 환희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다.
신은 유기적 관계인 우주의 다원성을 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체 가운데 다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우주가 나요, 내가 우주이고, 하나의 티끌이 우주요, 우주가 바로 한 티끌이다(萬物如我一切). 이러한 “개체이자 전체”(고전 3: 22-23)인 진리는 범신론(汎神論)7적이며, 예수는 우주적 존재로서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유지된다. “영이신 하나님”(空, 요 4:24)은 전체성이며 하나의 생명으로서 영적, 직관적으로만 체험된다. 이러한 보편적인 “궁극적 실재”는 종교적 체험으로 종교 간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며, 문화나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달리 부르지만, 어느 특정 종교에만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자각할 때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의 순수 에너지인 신의 작용은 온전하다”(잠 19:21)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2장_ 보편적 하나님> 중에서
내가 누구인가?(Who am I?)의 자기 탐구는 바로 구원의 길이다. 즉 나는 본래 “육체이거나 마음”이 아니라 “신의 자녀”(true Self, 요1:12)이며, 신이다(요 10:34).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 2:20)은 마음의 등불인 “내면의 눈”(마 13:16)을 뜨게 하며 “육체와 영혼”8이 다르다는 착각(ego)은 사라지게 된다. “내가 누구인가?”를 통하여 절대적 불이의 생명(Christ)을 “깨달은 자”(마 13:23)에게는 좋아함과 싫어함이 있는 상대적인 이 세상은 아무 가치가 없다. 즉 육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영원한 “지켜보는 자”(true Self, 눅 10:23)가 되면 유한한 죽음과 질병이 사라진다.
<3장_ 절대적 인간> 중에서
회개를 통하여 모든 염려를 버리고 하나의 본래적 자아인 속사람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5(고후 5:17)이 되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모든 갈망을 여의고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사람, ‘나’와 ‘나의 것’이라는 느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평화를 얻는다”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삶 즉 깨달음의 삶으로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와 같이 삶을 놀이로, 또한 축제로 즐겨야 한다.
<4장_ 내면의 변화인 회개(깨달음)>중에서
보편적 생명(神性)인 예수와 우리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전체성이며, 하나라는 것이다. 즉 개체와 전체는 하나로서 모든 만물은 동등하다(고전 12: 12). 예수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상호의존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진리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의 신”이 아니라 다수와 하나의 분별이 사라진 신을 믿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시공의 경계를 벗어나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는 하나”(양자물리학)임을 인식하며, “이원성을 초월한 눈”(마 13:16)으로 지극히 작은 자가 예수와 동등한 하나임을 깨달아 사랑의 꽃을 피워야 한다(自他一如, 마 25:34-45). 세상 모든 것이 자신과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 자 즉 지혜의 빛으로 충만한 자는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으며……그에게는 흙이나 돌이 금덩이와 별다름이 없는 하나이다(바가바드 기타).
<5장_ 우주적 예수 그리스도> 중에서
“내 목숨”은 시공 안의 그림자와 같은 환(幻)에 지나지 않는 멸망의 생명인 개체성이고 “다시 얻기 위함의 목숨”은 영원한 생명인 보편성이며, 동양적으로는 도(道, 佛性)이다. 영생을 얻음은 “죽음이 부활”인 하나의 진리를 깨달아 유한한 “죽는 몸”으로부터 벗어나 생사가 없는 무한한 신성으로 거듭남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 속에 썩어질 수밖에 없는 부활의 몸은 결국 사라지며(生者必滅), 헤어진다(會者定離). 이러한 비이성적인 육체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종교회의에서 나온 것이다. 영혼이 잠에서 깨어남은 욕망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겉사람”이 사라지고, 본성인 속사람을 회복하며, “나사로야 나오라”와 같이 “죽은 자”를 부르는 새 생명(One)의 부활이다.
<6장_ 허상의 죽음과 영적 부활>중에서
우리 스스로 “내면의 생명”을 깨달을 때 눈앞에 있는 예수(진리,One)를 알지만, 그것을 무시하면 “죽은 것”(ego)인 세상 물질의 노예가 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라고 하신 “예수(Logos)의 세계”(빛)는 밑도 없고 끝도 없는 불이이며, “가장자리도 없는 무한한 하나의 생명”이다. 이러한 “전체인 예수”(진리)의 말은 과거 선지자들의 인간적 말과는 본질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음과 양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된다는 하나인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7장_ 내면의 종말(승천과 재림)> 중에서
구원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신성과 다르다는 생각(자기목숨, ego)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막 8:35). 또한, “예수 이름으로만”(행 4:12)에서와 같이 “예수(부처) 자신”(오노마)인 진리 자체의 신성을 통하여야만 성취된다. 예수와 부처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삶의 흐름을 벗어나게 하는 집착(죄)을 소멸하고, 본래 성품인 하나인 신성의 천국 진리를 깨달아, 무지(無知, 부조화)의 어둠에서 벗어난 광명의 행복된 삶을 위함이다(離苦得樂, 눅 4:43).
신비적인 결합인 진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초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이렇게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는 ego를 벗어난 사람은 고요한 평화를 누린다. 우리가 하나인 영적 세계를 자각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환희를 체험한다. 또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신앙의 길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한 탈종교적 태도이다.
<8장_ 하나((One) 되는 구원과 절대 행복> 중에서
하나님 나라는 저 세계에 있지 않다. 삼라만상(森羅萬象) 중에 숨쉬는 신비한 생명(One)의 작용이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에 현존하고 있다. 내면에 영(靈)인 천국의 씨(神性, true Self)가 뿌려져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큰 가지가 되고 서로 작용하면서 천국을 이룬다. 즉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씨앗”(極小)이 어떤 푸성귀보다도 “큰 푸성귀”(極大, 생명)로 자라서 삶을 환희의 축제로 만든다.
우리가 ego를 버리고 흐르는 물처럼 저절로(by itself) 살아간다면 하나인 천국의 삶이 된다(막 14:36). “진리와 하나” 된 사람은 전체성(영적)이 되었으므로 무위적으로 취하려고 하여도 취할 것이 없고, 버리려고 하여도 버릴 것이 없는 “무심의 삶”(One)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깨달은 자)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애쓰지 않아도, 생각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저절로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다(중용).
<9장_지금 여기의 하나님 나라> 중에서
1장 둘이 아닌 하나(One)의 진리
2장 보편적 하나님
3장 절대적 인간
4장 내면의 변화인 회개(깨달음)
5장 우주적 예수 그리스도
6장 허상의 죽음과 영적부활
7장 내면의 종말(승천과 재림)
8장 하나(One) 되는 구원과 절대 행복
9장 지금 여기의 하나님 나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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