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는 그녀의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최근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를 놓고 부모님과 대화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에게 투 표한 81퍼센트의 ‘백인 복음주의자’ 무리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무슬림임을 감추고 있다고 의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에 사는 많은 남미 사람들이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지기를’ 바란다.
에이미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성경이 최고의 권위가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그녀는 결혼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그녀는 영 라이프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 온 동성애 성향을 공개한 또래들과 여전히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제 에이미는 자신이 복음주의자인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이렇게 말한다. “그 꼬리표는 너무 정치적으로 변했어요.” 현재 그녀가 마주한 실질적인 과제는 옮겨 갈 교파를 정하는 것이다.
(17, 18쪽)
사실상 듀댓의 ‘붕괴’ 시나리오는 복음주의의 실패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견한 것이다. 그렇지만 꼭 그렇게 진행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자’라는 꼬리표를 지키는 데 성공하려면 반드시 똘똘 뭉쳐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꼬리표 때문에 확인 – 지금까지 – 된 유산 가운데 최고의 것을 보전하기 위한 명확한 전략을 의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복음주의 운동을 떠나겠다고 가볍게 말하는 학계의 지도자들에게, 이곳에 머물면서 이 전략을 수행하는 데 참여하기를 간절히 요청한다.
(23쪽)
빌리 그래함은 나의 영웅이었고, 이듬해 그 마음은 더 커졌다. 1957년 그는 뉴욕시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그의 크루세이드crusade 운동을 시작했고, 우리 북부 뉴저지 교회의 교우들은 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는 사람들의 버스 경비를 후원했다. 신앙이 없던 고등학교 친구들 몇 명을 초대해서 함께 참석했던 저녁 집회 가운데 어느 날,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원자로 영접하는 수백 명의 무리에 동참하라는 빌리 그래함의 초대에 그 친구들 중 한 명이 반응해서 복도로 내려갔을 때, 나 역시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내게 그날 밤은 내가 복음의 약속을 품에 안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서 확인한 칼 헨리와 그래함의 분명한 동반자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께 개인적으로 헌신하라는 복음주의자의 소명과 지성인들의 사회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일 사이에서, 그리고 또한 내가 나중에 알게 되었던 것처럼 복음주의와 공적인 삶의 문제들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것 사이에서 어느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39, 40쪽)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무오inerrant’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것은 ‘무류infallible’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실제로 준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의 지적인 동의를 요구하는 일련의 제안들 그 이상의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 꿈, 환상, 명령, 노래, 불평, 변론, 비유, 그리고 연애편지 등을 주는데, ‘무류’는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성경에 기록된 이런 요소들에게 인도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딱 맞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온 메시지와 다름없고,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을 위해 우리가 붙잡아야만 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에 대해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좋은 뉘앙스를 전부 다 담아서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일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믿는다.”
(52쪽)
어느 복음주의 대학이 주최해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한 강연에 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이름을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빌리 그래함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강의 중간에 스치듯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날 강연이 끝나고 나눴던 대화에서 그 학교 교수 가운데 한 분이 내게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도 자신의 수업 시 간에 나처럼 스치듯 빌리 그래함을 언급했다고 했다. 수업을 마친 후에 한 학생이 그녀에게 다가와서 빌리 그래함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그녀는 그 다음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빌리 그래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수업에 참석한 마흔 명의 학생 가운데 대략 여섯 명의 학생만 손을 들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런 반응은 주립대학공립대학은 특정 종교 색을 띠지 않는다 – 역주 강의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55, 56쪽)
사이저Sizer는 죄와 반역, 그리고 용서의 필요성이라는 오랜 요소들이 구원 찬송 가사 가운데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전의 법정 시나리오는 더 부드러워지고 상당히 흐려졌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유연해진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도시 빈민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형태는 종종 성경적 가치들과 공공연하게 충돌했다. 이러한 곳에서 사역하고 있던 복음주의자들은 도시 생활의 사악한 형태를 평가하면서 고려해야 했던 것, 곧 그 지역 사람들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요소들 가운데 갇혀 버린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세대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럴 수 있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죄악의 반역적 요소들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예를 들어, 성매매와 알코올 중독은 여전히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행동 유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도시에서 사역하던 복음주의자들은 많은 사람이 이렇게 나쁜 형태로 타락하지 않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사회적 상황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죄를 짓는 많은 개인들을 그런 사회적 상황들에 희생된 사람들로 보는 시 각이 필요했다. 결국, 술꾼이나 음란한 사람들은 모두 법적인 범죄자이면서 동시에 동정심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75, 76쪽)
나는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종종 과도하게 부정적이었다는 그릴리와 루이스 모두의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죄에 물든 인류가 엉망으로 망가졌음을 강조하는 우리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가 장 일상적인 기쁨을 추구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류의 죄가 만연한 특성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창조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기 위한 사실적인 – 그리고 종종 기만적으로 현혹하는 –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을 칼빈주의자의 특별한 부르심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다. 그래서 특히 우리 삶의 에로틱한 측면을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선하다 선언하신 창조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또한 그것이 죄의 지배 아래에서 창조주의 목적을 위배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실제 위험을 지적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성은 구속받아야 하는 타락한 본성의 많은 측면 가운데 하나다.
(97쪽)
많은 현대 예배 음악의 내용은 또한 꽤 탄탄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Alone’우리말 찬양 제목은 ‘예수 안에 능력 있네’ – 역주, 그리고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How Deep the Father’s Love for Us’는 명백하게 이론적으로나 영적으로 풍부한 찬송가의 예시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대다수의 다른 짤막한 노래들은 올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필수적인 신적 위엄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때, 우리가 신성한 보좌가 놓여 있고 하나님 “나라의 권위가 그의 보좌에서 그의 세계 위로 흘러”내리는 – 잭 헤이포드Jack Hayford의 ‘장엄함Majesty’의 가사 –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126, 127쪽)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나타내는 복음주의를 표현할 때 필수적인 부분은 뚜렷한 경이로움, 그리고 전능자께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표현들이 분명 히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그 실체들을 신학적인 형태로 담아내려 노력한 용어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경이와 경외를 정확히 포착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진술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꽤 엄밀해진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의 인문대학과 종합대학교들은 교수들에게 – 그들의 전공 영역이 어디든 간에 – 제법 상세 한 신앙 선언문에 동의하라고 요구한다. 신학교에서 사용하는 이런 종류의 선언문은 훨씬 구체적이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종종 엄격한 교리 시험에 응시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다른 어떤 전통보다도 여전히 더 많이 우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단 재판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어째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짝지 우는 영적인 경이로움을 신학적으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라고 주장하는 걸까?
(132쪽)
나는 신학에서 어떤 관점이든 괜찮다고 믿는 상대주의자가 아니 다. 특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르게 지내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궁금증이 생길 때 무엇을 삶의 기본적인 쟁점들로 선택해야 하는지를 꽤나 신경 쓰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로 승천하셔서, 거기로부터 마침내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다시 오실 분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그런 문제들을 다루는 깊이 있는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나의 온 마음을 다해 믿는데, 내 가 이렇게 믿는 이유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옳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인식해야 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떤 것도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설 필요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 필요를 상쇄시키지 않는다. 사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자유롭게 다른 종교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 – 깊은 질문들 – 을 살피고 그 질문들에 대한 올바르고 심지어 설득력 있는 답변들을 그들의 종교적 틀에서 어느 정도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그들과 함께 탐구할 수 있게 해 준다.
(151, 152쪽)
대화 상대를 정하는 일에서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종종 우리의 특징과 고정관념이 유지되게 놓아두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더 넓은 배경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다른 기독교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심지어 더 나쁜 것은,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 이웃들에 대해 거짓된 증언을 하는 죄를 지속적으로 범하는 상황을 촉진시킨다.
칼리지빌에서의 경험은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하는 크고 공식 적인 대화들보다는, 더 친밀하게 계속해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는 대화들이 죄로 물든 이런 경향들을 교정하는 데 성과를 낸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나는 C. S. 루이스가 그의 영적 여정을 묘사하기 위해서 쓴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이라는 표현에 오랫동안 감동받아 왔다. 나 자신의 여정에 대해 비슷한 책을 쓸 계획은 없지만, 그래도 해 본다면 내 이야기의 제목을 ‘예기치 못한 당혹스러움surprised by perplexity’ 이라고 정하겠다.
(171쪽)
이 세 명의 사상가 – 칼빈, 카이퍼, 바빙크 – 는 모든 인간의 삶에 주어진 죄의 비극적인 효과들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서 부패는 전적total인 –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는 –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absolute 부패 – 죄로 물든 마음과 정신에 서 나온 모든 사상과 행위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치가 없다는 가르침이다 – 를 확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관점은 분별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정치적인 삶에서 우리가 ‘저 바깥’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 본질과 근원을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가끔은 하나님의 계획에 봉사하도록 설계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정의와 공의의 흔적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다. 기독교인의 정치적 삶은 그러므로, 우리와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이것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합동 전투 행위co-belligerence’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다른 세계관을 공언하지만 공적인 삶에서 특정한 이슈들에 대한 목표들과 전략들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임시로 동맹들을 형성하도록 이끈다.
(180, 181쪽)
어느 한 ‘교회’가 정치적인 주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당연한 일로 보거나, 또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길을 만들어 갈 때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때는 잘못된 선택들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제도적 교회와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준準교회parachurch라고 부르는 것 사이를 구분함으로써 피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예배 공동체에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는 소명을 확인하고 더 넓은 문화 속에서는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다른 기독교인들과 함께 모여 삶의 중요한 영역에 대한 관점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대안으로서 효과적이다. 제도적 교회는 지역 교회개 교회나 교구교회 – 역주로부터는 한 발짝 물러서지만 또한 순전히 개인적인 제자도를 향해서는 한 발짝 앞서 나아감으로써 공동체의 논의들을 중개하는 일을 촉진시켜야 한다. 나는 그렇게 구분된 공동체들이 정치 생활의 자세한 부분들이 가장 잘 다루어지는 곳이라고 확신한다.
(199쪽)
복음주의자들의 공적 인식에 관한 최근 여론 조사는 – 젊은 복음주의자들이 예전 세대들을 보는 관점에 대한 보고서들을 포함한다 – 복음주의가 천박함과 정죄주의judgmentalism를 조장한다는 평판을 가지 고 있음을 보여 준다. 나는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예배 공동체 생활에서 효과적으로 영적 형성을 공급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행 하시는 사역의 대리자라는 뚜렷해진 정체성을 가지고 예배 장소를 나서기를 바란다. 최근에 개최된 교회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토론 가운데 하나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개념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로 나아온다. 그리고 하나님 그분께서는 우리를 교회로부터 그분을 섬기는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보내신다. 예배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보내심에 대하여 교육받는 공간이어야 한다.
(207쪽)
두 관점 – ‘대속수직적’과 ‘권세를 무력화하는수평적’ 관점 – 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성경적으로 충실하게 이해하는 가운데 함께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은 N. T. 라이트Wright가 잘 설명해 주었다. 그는 최근에 승리자 그리스도 관점의 강력한 수호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주의 비평가들 중 일부는 그가 속죄의 대속적 측면을 쉽게 부정하는 것이라고 엄청나게 비난했다. 하지만 그 비난들은 틀렸다. 라이트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죄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이 십자가를 보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고 있던 죄와 악의 짐이 우리에게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수치와 죄와 같은 개인의 짐들은 십자가에 못박혔다.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복음이 선포하는 중심에서 그 메시지를 주장했다. 또한, 이런 강조점들을 담아낸 다양한 형상들이 있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결코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분께서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서 있는 곳에 영원한 결과를 가져오는 거래에 참여하셨다.
(228, 229쪽)
과거의 복음주의자들이 특정 운동이나 연합에 환멸을 느낄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전략 가운데 하나를 채택했다. 하나는 그 유산을 실제로 상속받는 새로운 통합적 실체를 형성하기 위해 움직이는 ‘분리’된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도하고 일하면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먼저 제시된 선택지는 종종 복음주의적 분리주의라는 최악의 상황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공동의 전략이라는 가치를 분명히 갖고 있다. 다른 선택지는 그 단점이 분명하지만 이전 의 갱신 운동으로부터 영감을 얻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러한 각각의 전략들이 그저 다양한 방향으로 한결같이 표류하는 것보다는 더 바람직하다고 평가한다. 현재까지 나는 그 운동의 유산의 정점에서 떠나 버린 지도자들에 의해서 꼬리표가 떼이는 것을 그저 허용하기보다는 두 번째 선택지로 – 복음주의의 갱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 향하고 싶다. 그리고 ‘갱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의 이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는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다 양한 곳에서 우리가 성공하기를 기도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다.
(237, 238쪽)
리처드 마우는 『흔들리는 신앙』에서 복음주의를 영적이면서 심지어 지성적이기도 한 전통으로서 사려 깊게 지키려는 생각을 명확하게 밝힌다.
– 사라 존스Sarah Jones, ‘뉴욕 매거진’ 전속 작가
리처드 마우는 수십 년이 넘도록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을 위한 아주 많은 지혜를 전수해 주었다. 이어서 이 훌륭한 책을 선물해 주었다. 특유의 솔직함, 겸손, 그리고 희망을 드러내며 마우는 그 자신의 복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려 왔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으로써 그 정체성을 관대하고 신실하게 나타내는 길을 가리킨다. 다른 흔들리는 신자들을 위해서 이 책은 필요한 요소들을 담고 있다. 몇 가지를 바로잡기도 하고 또 달래기도 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선물들을 풍성하게 찬양하는 그런 것들이다.
– 린 반 다이크Leanne van Dyk,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총장
『흔들리는 신앙』은 우리에게 오늘날의 세상에서 우리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하도록 자극하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 있게 도와준다. 이것은 특히 대학과 신학교 교육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필요로 했던 자원이다.
– 디나 포터필드Deana Porterfield, 로버트 웨슬리안 칼리지, 노스이스턴 신학대학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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