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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조선에 온 첫 번째 선교사와 한국 개신교의 시작 이야기

$36.00 $25.20

저자/역자 :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이만열  |  출판사 : IVP
발행일 : 2015-04-05  |  (148*210)mm 396p  |  978-89-328-1793-4
언더우드·아펜젤러 한국 선교 130주년 기념 도서
한국 개신교의 시작,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다!

“조선 도착 당시 25세 약관의 젊은 청년이었던 그가 격동의 조선 말 한겨레와 더불어 뿌리고 가꾸어 온 미래 기독교 한국의 꿈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하고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다시 한 번 귀 기울이고 주목해야 할 언더우드 선교사를 새롭게 만날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초기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하도록 사람들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와 남북분단기의 아픔과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한국과 한국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진홍(뉴브런즈윅 신학교 종교·선교사상사 부교수), 이수영(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정갑영(연세대학교 총장, 경제학과 교수), 조현(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추천!

기독교 복음은 처음부터 어떻게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왔는가?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것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 개신교회가 이제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이 책은 그 한국 개신교의 시작에 대한 희귀하고 소중한 증언이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누구보다도 친밀하고 생생하게 그의 생애를 그려 낸다. 아울러 당시 한국의 풍속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복음으로 이 나라를 변화시켜 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래서 한민족이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얼마나 갈급해하며 복음을 흡수했는지, 얼마나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했는지가 언더우드의 헌신적인 선교 이야기에 한데 엮여 가슴 뜨겁게 펼쳐진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구한말 격동기를 지나는 한반도의 긴박한 상황에서 언더우드가 어떻게 교파나 인종, 시간, 장소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을 위해 애써 분투하며 일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그래서 복음 전도, 성경 번역, 사전 편찬, 신문 발행, 대학 설립 등 다방면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사랑임을 분명하게 역설하며 우리에게 도전을 준다.

이 땅에 최초로 온 선교사로서 언더우드가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항에 발을 디딘 지 130여 년이 되는 이때, 이 책은 한국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벽안의 선교사 이야기를 통해 한국 교회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첫 마음, 첫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우쳐 줄 것이다.

■ 출판사 리뷰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본 한국 기독교의 시작 이야기
언더우드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한국에 입국한 뒤, 남은 생애를 바쳐 이 땅과 이 땅의 백성을 사랑했던 한국 개신교 첫 선교사다. 언더우드는 척박하게만 다가오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습득해 가며, 기독교 복음을 한반도에 전파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이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초대 총회장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초대 목사다. 그러나 언더우드의 섬김은 이런 공식 직함과 이력을 넘어선다. 그는 생명을 걸고 전도 여행을 떠났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어 교회를 세웠으며, 평생에 걸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또한 고아원과 학교를 세워 다음 세대를 키워냈고, 한국어 사전과 문법서를 펴내고 신문을 발간했으며, 한국 교회의 성장을 위해 가르치고 조직한 열성적인 복음 일꾼이었다. 아울러 그는 기울어 가던 조선 왕실의 가장 신실하고 친밀한 친구이기도 했다.

언더우드의 아내로서 이 책의 저자인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여사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하며 죽음을 감수하는 고난과 위기를 여러 차례 겪어야 했던 언더우드의 생애를 그려 낸다. 그녀는 언더우드가 이룬 모든 업적과 활동의 원동력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구체적인 사건과 이야기를 들어 증언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남편을 지켜본 저자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 전기는 언더우드의 헌신과 모험을 감동적으로 전해 줄 뿐 아니라 그가 한겨레를 두고 하나님께 받은 비전들과 소명을 다시 확인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지 탁월한 모범을 제시한다.

이 전기는 복음에 헌신한 열정적인 선교사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시 한국 사회와 교회의 모습을 알려 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인들이 복음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했으며 어떤 희망을 붙들었는지를 생생하게 밝히는 동시에 구한말 격동기 한국인들의 구체적 상황을 잘 전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책을 번역한 이만열 교수는 이 책의 서술을 따라가며 꼼꼼하게 역주를 달아 역사적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해설함으로써 책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고 독자들이 좀더 쉽게 언더우드의 생애에 다가가도록 했다.

개신교가 시작된 지 130여 년이 되는 때에 다시 발간되는 이 책은 이 시대 교회에 산적한 과제를 감당하고자 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회복해야 할 처음 교회의 깊은 신앙과 소망을 발견하도록 도울 것이다. 아울러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선교사와 한국 교회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한계들을 보여 줌으로써, 오늘 우리의 한계를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다.

올해 2015년은 복음 선교사 아펜젤러·언더우드가 이 땅에 온 지 꼭 130주년이 되는 해다.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의 파송을 받았고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았다. 이들에 앞서 만주를 통해 성경이 번역·보급되어 개종자가 일어나고 있었고, 바로 그 시기에 한국은 이들의 복음에 접목되었다. 그 뒤 한국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초대 선교사인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다시 한 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인 언더우드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많은 논문들과 한두 권의 저술 및 자료집이 나왔다. 그중 이광린 교수의 「초대 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연세대출판부, 1991)가 한국인이 언더우드에 대해 쓴 최초의 저서다. 그 뒤 옥성득 교수가 편역한 「언더우드 자료집」(전 5권)은 언더우드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 같은 자료집의 간행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부족한 편이다. 언더우드 연구는 단순히 그의 생애와 업적, 신학과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국 근대사에 미친영향까지 고려하여 좀더 거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아직도 그 같은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판단이 이 번역서를 다시 간행토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_“개정판 역자 서문”에서

이 글을 서술해 가는 동안 필자에게 점점 더 명확해졌던 사실은, 언더우드의 전 생애 가운데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 즉 하나의 지배적인 성격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교파나 인종이나 시간이나 장소와 같은 좁은 테두리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무한히 넘쳐흐르는 위대한 사랑이었다. 수많은 심령들이 그에게 다가와 사랑의 마음으로 인격적인 헌신을 한 것도, 또 그가 전 생애에 걸쳐 “타오르는 횃불”(a torch of fire)이라 불리면서 일관되게 살아가게 한 것도 그의 이러한 사랑이었다. 그는 믿음과 소망의 놀라운 은사를 받았지만, 사랑이야말로 그중에서 제일가는 은사요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그의 성품과 선교 경험에 대한 연구가 독자들에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필자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다.
_“서문” 에서

이 아이들에게 일요일은 결코 지루한 날이 아니었다. 호러스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높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덜렁거리지 않도록 다양한 높이의 의자를 구비해 놓는 등, 교회의 모든 것에 신경을 써 주어 아이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재미있고 편안한 일로 여기게끔 해주었다. 물론, 좀 자란 아이들에게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설교와 설교 본문 중에서 뭔가를 얻은 것이 있기를 바라며 물었다. 특히 호러스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아버지의 갈망과 기다림을 온전히 물려받았다. 이것은 이후에도 그가 계속해서 생각하는 주제가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시대에 영광된 재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또한 그가 한국인들을 처음 가르칠 때부터 이 소망을 그들에게 전해 준 결과, 이제는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날을 바라고 기다리는 데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_1장 “혈통과 교육”에서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선교를 위한 아무런 준비 활동도 없이 1년여를 보냈다는 생각에 격동하여 저는 한국에 갈 사람을 찾는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 자신은 인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이런 신념 아래 그곳에 갈 특별한 준비를 하기 위해 1년 동안 의학 공부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 기꺼이 한국에 갈 사람이 달리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서둘러 한국에 갈 사람을 물색해 보았지만,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한 채 1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교회는 한 군데도 없었으며, 외국 선교사업의 지도자들도 한국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왜 너 자신이 가지 않느냐?’ 이런 메시지가 제 가슴에 울려온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_1장 “혈통과 교육”에서

고아들을 위한 집과 학교가 문을 연 것은 1886년 초였다. 이 시점에서 언더우드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인 헐버트에게 언젠가는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그의 희망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기록해 둘 만하다. 이것은 그가 언제나 장기적인 안목을 지녔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 고아원은 국왕 폐하의 호의에 넘치는 승인을 받았고, 몇 년 후에는 ‘그리스도인 일꾼들을 위한 존 D. 웰즈 아카데미’(the John D. Wells Academy for Christian Workers; 儆信學校)가 되었다. 한국인 책임자가 있긴 했지만, 처음 한두 해 동안은 언더우드가 실제 고아원을 관리했고, 또 그 학교의 여러 학급을 가르쳤다. 당시 ‘김규식’(Kim Kiu Silk) 혹은 ‘변갑이’(Pon Ga-be)라 불리던 어린 존(John)을 맡게 된 것도 이 학교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_2장 “선교사 훈련”에서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서재 책상에서 두 복음서를 훔쳐보게 되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이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새도 없이 급히 그 두 권을 넓은 소매 속에 넣은 다음, 훔친 보물을 들고 집으로 달려왔다.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듯이, 우리의 친구 노 씨는 희열을 느끼며 금지된 문헌을 독파했다. 그는 이 책의 놀라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그의 마음에도 그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니라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밤새 그 책을 읽고 아침에는 그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용감하게도 복음이 ‘좋고 웅대하며’, 죽든 살든 믿음을 갖고 싶다고 언더우드의 서재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했다.
_2장 “선교사 훈련”에서

여기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이 여행에서 언더우드가 세례를 준 유일한 사람들이었으나, 이 숫자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 얼마 동안 그가 세례를 준 사람을 다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 다른 선교지에서 나타난 결과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짧은 선교 역사의 시점에서 이 숫자는 놀라운 것이었다. 훗날 소문이 퍼지면서 이 숫자는 과장되어, 언더우드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소위 새신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무턱대고 세례를 주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그와 정반대로 그는 매우 양심적이어서 이들을 심사하는 데 괴로움을 느낄 정도로 심사숙고했다. 몇 사람들은 1년 넘도록 교육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는 것을 언더우드도 알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서 씨가 3년 전부터 보고해 온 이들이었다.
_4장 “기억할 만한 여행”에서

그러던 얼마 후 빛이 다가와, 언더우드는 그 자신이 잘못된 방식으로 일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를 탐구하는 동안에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는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단어는 설명적인 용어로, 크고 ‘유일한’ 한 분(only One)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이란 용어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대해 그가 발견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그 의미가 원래의 의미이고 지금의 의미는 거기서 파생된 것임이 틀림없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이 본래의 의미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이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사용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쉽게 살아날 것이었다. 새로운 발견을 통한 이 빛 속에서 이전에는 자신이 거부했던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되었다.
_7장 “다시 한국의 집으로”에서

이렇게 모금을 권유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기독교는 외국 종교인데 왜 외국인들이 그 경비를 대지 않는지 알 수 없다는 한국인들의 반론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 외국 돈을 사용한다면, 기독교는 계속 외국 종교로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으로 교회를 짓고 전도사를 파견하고 여러분의 학교를 지원한다면, 여러분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가 더 이상 외국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수긍하여 자신들의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이것을 본 언더우드는 놀라서, “여러분은 이렇게 가난한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불가능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_8장 “한국에서의 운명의 날들”에서

그때 강변의 행주에서 시작되고 있던 작은 기독교 교회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것은 명백히, 콜레라에 전염된 사람들을 위하여 간호하고 치료했던 선교사들이 한 일의 결과였다. 뒤에서 언급하게 될 신(Shin)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민족을 향한 선교사들의 수고와 사랑을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놀라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상은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짐을 나르는 도구(‘지게’, jicky)를 메고 16킬로미터 떨어진 행주로 내려갔다. 그는 거기서 품팔이꾼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 믿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리도록 자기 집을 내주었고, 아이들은 교회에서 찬송가를 배웠다. 언더우드는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겠다고 요청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_9장 “순회 선교사”에서

언더우드는, 양반과 사대부 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가 본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온갖 종류의 장애물들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황제가 종묘 앞에서 정기적으로 배례할 때마다 모든 공직자들은 함께 경배를 드려야만 했다. 더구나 대부분의 관리들은 대가족의 가장으로 가문의 위패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중요한 산소들을 보살피고 제삿날이 돌아오면 엄격하게 제사를 모셔야 했다. 더불어 이들 대부분은 최소한 두 아내와 그에 따르는 가족과 자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가족들에게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대부분 본부인보다 후처에게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본처와는 대부분 매우 어렸을 때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가 짝지어 주는 대로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들 생활의 모든 사회적·정치적·종교적 영향력들이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_11장 “넓어지는 강”에서

원산에서의 이 놀라운 경험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 전역에 퍼져, 1906년 봄과 초여름에는 그와 비슷한 놀라운 부흥이 남장로교 선교지부 한 곳12을 휩쓸었으며, 1907년에는 북부 지방의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커다란 부흥이 뒤따랐다. 그 부흥들은 성격이 모두 똑같았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특징은 아무리 작은 죄라도 감추어 놓고 있으면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종종 바닥에 뒹굴거나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혀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뒤이어 하나님의 거룩함에 거역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고백이 있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계속되었다. 또 전 회중은 통성으로 크게 기도했으며, 함께 울고 기뻐했다. 특히 1905년과 1906년 사이의 겨울에는 모든 선교회들이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에 각지에 축복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_12장 “어둠과 빛”에서

개정판 역자 서문
역자 서문
서문

1. 혈통과 교육
2. 선교사 훈련
3. 중요한 시작
4. 기억할 만한 여행
5. 문법학자이자 사전편찬자
6. 바쁜 휴가
7. 다시 한국의 집으로
8. 한국에서의 운명의 날들
9. 순회 선교사
10. 옹호자-화평케 하는 자-대사
11. 넓어지는 강
12. 어둠과 빛
13. 일본의 보호국
14. 연합의 전조
15. 열성적인 지방여행
16. 유럽에서의 휴식
17. 미국에서의 한국 홍보 활동
18. 선교지의 분할
19. 심각한 부상
20. 축복의 소나기
21. 미국 대표단
22. 1914-1915년
23. “여정을 마치고 본향으로”

연보
색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앞으로 좀더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한국교회사를 넘어 세계선교 역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어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선 도착 당시 25세 약관의 젊은 청년이었던 그가 격동의 조선 말 한겨레와 더불어 뿌리고 가꾸어 온 미래 기독교 한국의 꿈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하고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이 책의 저자는 의료선교사로서 조선에 와서 8년 연하의 총각 선교사와 결혼하여 27년간을 동고동락한 선교 동반자다. 그들의 생생한 기록을 담은 이 책에는 귀중한 선교사적 자료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찬양가에 불과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서술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20세기 초에 쓰인 기독교 전기임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언더우드 연구의 기본 교과서이며 출발점임이 분명하다. 사반세기 전 이 책을 번역하고 출간하여 한국 기독교 선교사 연구의 새 장을 열어 준 이만열 교수가 새롭게 꼼꼼히 다듬고 역주를 더한 이번 개정판은, 지난 25년간 집적되어 온 귀한 연구가 오롯이 담긴 값진 선물이다.
_ 김진홍 뉴브런즈윅 신학교 종교·선교사상사 부교수, 언더우드글로벌기독교센터 디렉터

언더우드는 위대한 선교사였다.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도 그보다 더 위대한 선교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언더우드의 삶과 사역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데, 감사하게도 그와 27년간 삶을 나눈 호턴 부인이 직접 그의 전기를 남겨 주었다. 1990년에 한국에 처음 번역·출판된 이 전기가 이번에 새로 정밀하게 다듬어져 출판되는 것을 보게 되어 매우 기쁘다. 역사학자인 번역자는 단순히 원문을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곳곳에 역주를 달아 좀더 객관적인 사실을 제공해 준다. 그래서 행여 저자가 전기 주인공의 아내로서 보일 수 있는 편향을 보완함으로써 이 책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이 귀한 전기가 널리 읽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한다.
_ 이수영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언더우드 선교사는 성공한 사업가인 형과 함께 평생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고 낙후된 조선에 와서 평생 이웃을 위해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았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25세의 나이에 제물포항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일생 동안 조선인들로부터 양귀라고 배척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전을 만들고, 각종 위원회의 주도적 인물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또한 청년들이 서양의 고등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연세대학교의 근간을 세우고 가르쳤다. 언더우드 선교사야말로 자신을 녹여 세상에 짠 맛을 주는 소금이요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조선에 도착한 이래로 언더우드 선교사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아내 호턴 여사가 직접 쓴 언더우드 이야기가, 용재석좌교수로 연세대학교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이만열 교수의 손에 의해 다시 한 번 새롭게 번역·출간되어 더더욱 반갑고 귀하다. 이 책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한국 사회와 교회가 다시 한 번 귀 기울이고 주목해야 할 언더우드 선교사를 새롭게 만날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_ 정갑영 연세대학교 총장, 경제학과 교수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기독교의 등장이다. 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주류 종교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의 위치는 독특하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는 근세의 여명기에 이 땅에 들어와 급격한 서구화와 산업화를 선도했고, 시민의식을 싹트게 한 민주화의 주역이었다. 그 서막을 연 인물이 바로 언더우드다. 다방면에 걸친 놀라운 능력을 갖춘 그가 애초 계획했던 인도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 머문 30년간 성서를 번역한 것 외에도 한영문법책을 만들고, 광혜원과 고아원,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여 사회복지와 학문의 길을 개척한 그는 선교사일 뿐 아니라 이 땅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가 쓴 전기를 언더우드가 이 땅에 도착한 지 130년 만에 다시 펴내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유아기, 청소년기를 거쳐 이제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할 어른으로 성장했다. 이 책이 초기의 열정과 헌신을 회복하도록 사람들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일제와 남북분단기의 아픔과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한국과 한국 기독교를 만들어 가는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_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Lillias Horton Underwood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으로 미국 뉴욕 주 알바니에서 1851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시카고로 이주했으며 인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친구를 통해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카고 여자 의대(현재는 노스웨스턴 대학에 소속)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의학도 시절부터 인도의 의료 선교사가 되려는 소망을 품었다. 1888년 3월에 조선에 도착하여,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 서구식 병원인 광혜원의 부인과에 근무하면서 명성황후의 시의로 겸직했다. 1889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결혼했고 남편이 설립한 소년들을 위한 고아원에서 영어와 산수를 가르치며,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주요 저서로 「상투잽이와 함께 보낸 십오년 세월」 「호러스 언더우드와 함께한 조선」 외에 조선에 관한 여러 책을 썼다.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 사회 사업 등에 전력하다가 1921년 10월 29일 세상을 떠나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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