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래가 반영구적으로 계속되는 불멸하는 영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짧은 인생을 사는 삶에 불과하다. 우리는 비축광이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우리 자신을 삶에 쏟아놓아야 한다.
나는 비록 매우 간략하지만 원래적 예수의 재구성된 가르침이 정확히 분석만 되면 우리를 덧없음과 죽음을 걱정하는 현대인의 불안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옴으로써 어떻게 새로운 인도주의적 일상적 삶의 종교를 영감으로 보여줄 것인지를 가리키고자 노력했다. 여태까지 적어도 예수의 윤리는 비실천적이라고 종종 주장되어 왔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그와는 정반대로 내가 한 노력은 예수의 윤리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단 한 가지 필요는 우리 자신의 덧없음과 화해하고 서로와 화해하는 것이며 이는 온힘을 다해 관용을 실천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저자 서문> 중에서
큐핏의 탁월한 통찰은 예수가 도덕성의 원천을 우주의 도덕적 질서도덕적 질서나 신의 도덕적 명령도덕적 명령에서 찾지 않고, 사랑사랑의 개념에서 구한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사랑사랑의 느낌을 도덕적 표준으로 세운다. 예수의 윤리예수의 윤리학윤리학에서 사랑사랑의 감정과 정서는 도덕적 판단과 행동의 기초로 채택된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예수의 윤리는 급진적인 것이고, 세속적세속적인 것이며,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는 현존하는 실재를 고정 불변하고 고칠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현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가져오고자 했다. 예수는 우리가 도덕적 열정과 투명성을 가지고 현실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바꾸기로 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러한 세계에 있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사랑의 정서와 마음으로 세속을 초월하라고 명령한다. 이 초월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사랑사랑을 주고받고 사랑사랑에 따라 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제약 요소들을 자각적으로 인식하고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수의 세속적세속적 초월이야말로 예수의 유토피아적 급진 휴머니즘급진적 휴머니즘휴머니즘 윤리의 정수이다. 나는 그것이 세속 성자(세상속의 성도)의 일상적 삶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역자 해제> 중에서
큐핏의 예수론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 유산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 주었다. 그의 예수론은 예수가 우리에게 전해준 잃어버린 꿈을 회복하게 하고 이 지상의 세계에서 인류가 인종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비전과 방향을 시종일관 제시하고 있다. 그의 예수론의 가치와 공적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큐핏의 예수론은 예수를 실재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현대 제국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거대 담론적 패러다임은 큐핏의 예수론이 확실히 한 예수의 급진적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구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것으로 우리가 세계화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큐핏이 서문에서 말하는 역사적 오류와 간격을 극복하는 실천이며 현대의 진보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성업이라고 믿는다.
<역자 후기> 중에서